겨울이었다. 나는 어딘지 모를 곳을 정처없이 걷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새하얀 눈 뿐이었고 살을 에는 추위가 엄습했다. 청바지에 티셔츠 신발도 없이 맨발로 눈길을 헤치며 걷던
나는 한참을 헤매다 잠에서 깨어났다. 꿈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집 거실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냉장고를 열어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는데
발쪽이 아렸다. 발을 내려다보니 엉망이었다. 흙이 잔뜩 묻어있고 군데군데 긁힌 상처까지 나 있었다. 울리는 머리통을
붙잡고 주저앉아 도대체 어제 무슨일이 있었던건지 곰곰히 되새겨 보았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분명 동네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평소에 술을 남보다 곧 잘 마시던 편이라
술마시고 실수한 적이 없었는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심하니 조금씩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억들 뿐이었다. 일단 뭐 없어진 물건은
없나 주변을 살펴보았다. 지갑과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다. 의문은 점점 커져만 갔다. 집전화로 친구들 한테 전화를 해봤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 일단 친구집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몸을 일으키자 도대체 어제 술을 얼마나 마신건지
아직도 머리가 빙빙 돌았다. 현관으로 나서려는 순간 낯설은 슬리퍼 한짝이 눈에 띄었다. oo부대찌개 라고 써있는
슬리퍼였다. 한쪽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나머지 한쪽만 덩그러니 현관에 놓여 있었다. 그 슬리퍼를 보는 순간
사라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제 내가 무슨일을 저질렀는지.
오랜만에 쉬는 날이 겹쳐 동네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그날따라 과음을 했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부대찌개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한껏 취할대로 취한 나는 화장실에 가기위해 건물 복도로 나섰다. 그리고 그상태로 집에 가버린 것이었다.
잠바와 핸드폰 지갑까지 식탁위에 올려놓은채 신발도 버리고 가게 슬리퍼를 신고.. 그것도 눈이 펑펑 오던 날에
집까지는 걸어서 20분거리였고 가는길에 슬리퍼 한짝마저 잊어버렸지만 나는 고향을 찾아 떠나는 연어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집은 찾아갔네 라는 마음에 뿌듯해 하고 있는데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평소에 술을 마시면 나는 항상 친구들을 챙기는 쪽이었다. 동네 친구들이 다 나보다 술을 못마셨기 때문에 항상 친구들과
술을 마신 다음날엔 술을 마시려면 나처럼 곱게 마셔야지 라고 훈계를 했었고 나의 이런 잔소리에 친구들은 항상
이런날이 오기만을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휘청이는 몸을 부여잡고 문을 나섰다. 내 작은 여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겨 친구네 집에 도착했다. 문 앞에 서서 벨을 누르자 문은 열리지 않고 친구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야'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고 친구는 말이 없었다. 문열어 라고 다시 말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적막이 흐르고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개다. ..'
'뭐?'
'나는 개다!'
다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장난치지 말고 문 열라며 친구에게 얘기했지만 친구는 단호했다.
'지갑이 필요없나보지?'
친구의 말에 나는 굴욕감을 참아내며 작게 말했다.
'나는.... 개다...'
'더 크게!'
'나는... 개다!'
'짖어!'
'왈왈! 왈왈!'
그렇게 나는 한참동안을 문앞에서 친구에게 조련당해야 했다. 이 문이 열리기만 하면 나는 도사견이 되어 친구의 멱줄을 물어
뜯기로 마음 먹었다. 드디어 문이 열렸고 나는 그대로 친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친구가 외친 '손!' 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고 말았다.
내 손에 지갑을 얹어준 친구는 연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굿보이'를 외쳤다. 끝을 알 수 없는 수치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친구에게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화장실에 간다며 사라진 나는 한참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없어진 걸 알아챈 친구들은 나를 찾아 거리를 헤매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찾아도 날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경찰서까지 가서 날 찾았지만 나는 온데간데 없었고 몇시간을 헤매다 포기하고 돌아가려 할 때 쯤
길바닥에 버려져 있는 슬리퍼 한짝을 발견한 친구들은 설마하는 마음에 우리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문 앞에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을 보고 내가 집에 있음을 알아챈 친구들은 한참을 문을 두드렸지만 이미 취해서 골아 떨어진 나는 아무 반응이 없었고
결국 포기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모든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는 머쓱해졌다. 그렇게 지갑을 되찾았지만 핸드폰과 잠바는 보이지 않았다. 나머지 물건들의
행방을 묻자 사악한 미소를 머금은 친구는 다른친구의 이름을 말하며 그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리곤 힘든 여정이 될거란
말을 건넸다. 그랬다. 열받은 친구들이 내 물건들을 하나씩 나누어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간 것이었다. 주몽같은 자식들.
핸드폰을 찾으러 가기 위해 친구 집을 나서는데 날 배웅하던 친구가 한 말은 자기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말이었다.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분명 어제 먹은 술 때문은 아니었다.
한참을 걸어 다른 친구의 집에 도착했다. 벨을 누르자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기다렸다는 듯이 친구의 말이 들렸다.
'나는 주정뱅이다.'
이 모든게 지난날 나의 행동에 대한 업보였을까. 참담한 심정으로 나는 주정뱅이다를 외쳤고 문이 빼꼼 열렸다.
문을 당겨 보았지만 체인락이 걸려 있었다. 문틈 사이로 날 보던 친구는 나에게 물었다.
'콜라는?''
'뭔 콜'
쾅!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은 다시 굳게 닫히고 말았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콜라를 사가지고 왔다.
다시 벨을 눌렀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시 나는 주정뱅이다를 외쳐야 했다. 콜라를 사온 걸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수는 없었다. 나는 먼저 핸드폰부터 보여주면
콜라를 주겠다고 얘기했다. 친구가 핸드폰을 보여주는 순간 나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핸드폰을 나꿔챘다.
전세역전 이었다. 승리감에 도취된 나는 이 개자식들아 복수할거야! 콜라는 개뿔 엿이나 쳐먹어라! 라고 미친놈처럼
외치며 친구를 조롱했다. 하지만 친구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해보였다.
세월의 무서움이란 이런 것이었다. 10년 넘게 얼굴을 맞대고 살아온 친구들은 이미 나의 모든 행동을 꿰뚫고 있었다.
배터리가 없었다. 한참의 정적이 흐르고 뒤늦게 콜라를 내밀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후였다.
결국 나는 주인님이 저에게 배터리를 주셨어요! 도비는 자유로운 집요정이랍니다! 라고 외친 후에야 배터리를 돌려
받을 수 있었다.
힘들게 핸드폰까지 되찾고 나서 나는 마지막 집으로 향했다. 벨을 누르자 아니나 다를까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쓰레기다.'
그럼 그렇지.
이미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져 이제는 더이상 저항할 마음도 자존심도 남아있지 않았다.
처량한 내 목소리가 울려퍼졌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친구의 말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너 어떻게 왔어?'
'뭘 어떻게 와 걸어왔지.'
'아니 어떻게 올라왔냐고.'
'엘레베이터 타고 왔지. 빨랑 문이나 열어.'
'이상하네. 엘레베이터 고장났는데?'
'고장 안났던데?'
'아니야 잘 봐바. 고장났어.'
그때야 감이 왔다.
'... 그래 고장났네.'
'그지? 그러니까 계단으로 와.'
친구네 집은 18층 이었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내 입에선 연신 친구네 집 층수가 튀어나왔다.
1층으로 내려와 계단을 올라가는 대신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대충 밑에서 시간을 보내다 적당히 시간 맞춰 다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계획이었다.
헐떡거리는 연기만 좀 하면 깜쪽같이 속아 넘어갈 것이었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친구였다. 그리고 영상통화였다.
이미 나는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 친구들은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새 친구들을 사귀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렇게 실시간으로 감시당하면서 18층 까지 뻘뻘대며 올라간 후에야 나는 잠바를 돌려 받을 수 있었다.
모진 수모와 고초, 굴욕을 당하면서 나는 죽을때까지 가슴에 품고 갈 잊지못할 교훈을 얻었다.